전원이 안켜지는 세탁기 자가 수리 성공했습니다

잡담 2016년 3월 8일

오랜만에 주부느낌 내보려고 청소도하고, 설거지도 하고, 아침드라마는 TV없어서 못보고, 밀린 빨래를 하려고 세탁기를 켰는데 전원이 안들어오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26살에 처음으로 자취시작해서 큰 맘먹고 중고로 샀던 세탁기가 산지 얼마 안되서 사망했었는데 그 때의 악몽이 되살아났습니다. 이 세탁기도 2015년에 큰맘먹고 8만원에 중고로 샀는데 산지 얼마 안되서 사망을 했습니다. 몇 개월동안 잘 돌아갔는데 갑자기 전원이 안켜지더군요.

세탁기에 적혀있는 '손빨래'와 '에너지소비효율 등급 1등급'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었달까요. '세탁기가 고장나서 내가 손빨래를 하니 덤으로 전기세도 절약이 된다'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해봤지만 역시 심기가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이 더러운 삼성놈들 지들은 돈세탁도 하면서 나한테는 손빨래하라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암튼 제 세탁기 모델명은 삼성 SEW-G100A고 출시년도는 검색해보니 무려 2002년이네요. 제가 01학번인데 대학교2학년 때 만들어진 세탁기군요. ㅋㅋㅋ 제가 머리에 두건 쓰고 다니고 공릉동에서 술쳐먹고 동아리방에서 자다가 수업들어가던 때에 태어난 이 친구를 고쳐서 써야하나 싶었지만, 저는 해체가 일상인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사는 빈민가 출신 뮤지션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고쳤던 수많은 이어폰과 게임패드와 모니터, 노트북, TV, 냉장고, 전등, 선풍기 등을 떠올리며 (참고로 모니터는 뜯으실 때 조심하세요. 모델에 따라 다르겠지만 고전압이 있는 놈들도 있습니다.) 자가 수리를 해보고자 마음 먹었습니다.

냉장고는 너무 커서 힘들었고, 선풍기는 윤활유가 다 굳어서 빡셌고, 노트북 GPU는 전문장비가 없어서 빡셌는데 제 경험상 전원이 아예 안들어오는 쪽은 오히려 수리가 쉬운 경우가 많았습니다. 대부분 전원단에 단선이나 먼지나 트랜지스터 고장이나 뭐 그런 경우가 많았습니다. 전에 쓰던 세탁기는 수위조절 센서가 고장난데다가 희안한 모델이라 오히려 수리가 어려웠는데 이번 세탁기는 대중적인 모델이고 단순한 전원단 문제여서 수리의 난이도는 별 다섯개 중의 하나였습니다.

일단, 정확한 증상 파악을 해봤습니다. 플러그를 다른 곳에 꽂아봐도 전원이 안들어오기는 마찬가지였고, 전원은 안들어오지만 기판이 있는 부분에서는 열이 발생했습니다. 열이 발생한다는 건 전기가 기판까지 간다는 뜻이고 냅두면 오히려 화재의 위험이 있어서 빨랑 고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세탁기 뚜껑을 열어서 위의 표시한 곳을 송곳같은 것으로 드러내면 나사가 보입니다. 나사를 빼면 세탁기 기판을 볼 수 가 있습니다.


구조는 크게 복잡해 보이지 않습니다. 요새 전자기기들은 복잡하게 칩같은 것들이 많이 들어있어서 부품이 없으면 아예 못고치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납땜질을 할 일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데 이 세탁기는 오래된 놈이라 간단해 보이네요.

그런데 문제는 기판이 방수를 위해 실리콘 같은 걸로 뒤덮여 있어서 몇백원에 고치려고 했던 제 의도와 달리 기판에 납땜이 아주아주 빡세 보입니다. 오랜만에 땜질 한번 하려고 했는데 글렀네요.

안그래도 테스터기가 어디갔는지 없어져서 육안으로만 확인해봤습니다.

제 세탁기의 경우는 위의 그림에서 검정, 파랑, 빨강으로 되어 있는 케이블과 흰색 케이블을 해제하면 기판 부분만 따로 떼서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요롷게 생긴 놈이 나왔습니다. 메인보드같은 거 들여다 볼 때에 비하면 아주 심플해 보이네요. (메인보드는 못고쳤었지만...)



아이유를 바라보는 유희열의 눈으로 기판을 들여다 봤더니 끄트머리가 까맣게 탄 놈이 하나 보이네요. 저 놈이 문제였나 봅니다. 다른 부분은 크게 망가진 것 같지 않네요. 저 놈이랑 똑같은 걸 사다가 갈면 되긴하는데 아까도 말했다시피 실리콘으로 뒤덮여 있어서 실리콘을 제거한다음에 남땜을 해야할 것 같습니다.


여기서 문득 '귀찮다'라는 생각이 엄습해 왔습니다. 게다가 똑같은 부품을 사서 실리콘을 제거하고 남땜을 딱 했는데 안될 확률도 꽤 있습니다. 부품 고장이 꼭 눈으로만 확인되는것은 아니라서요. 배불뚝이 트랜지스터를 교체하면 되는 경우도 있지만 배불뚝이도 아니고 타지도 않았는데 고장난 놈도 많이 있습니다. 그걸 일일이 확인하려면 노동력도 많이 들어가고 테스터기도 없어서 부품만 가는 것은 포기했습니다. 배송비+부품비는 몇천원안에서 끝나겠지만 노동력과 시간도 중요하니까요. 그리고 이게 무슨 최신 고급 모델의 세탁기도 아니고 세탁업계에서 한참 전에 은퇴했어야 할 노땅중고 주제에 그런 대접을 받게 해줄 수야 없죠.



그래서 여기저기 검색을 해보니 다행히 세탁기 기판을 파는 사이트가 있네요. 청계천 유통(https://www.ckcshop.co.kr/)이라는 사이트에 들어가보니 저같은 자가수리 서민들이나 업자들 이용하라고 부품을 팔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SEW-G100A 모델의 기판을 하나 구매했습니다. 가격은 자그마치 3만원이었지만 그래도 거의 확실한 수리법이고 간편하니까 구매를 했습니다.

부품을 받아보니 실리콘 드러내고 부품 교체한 자국들이 보이네요. 음.. 그냥 저렇게 해도 되는거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뭐 이미 구매를 했으니 세탁기 본체에다가 설치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짜자잔하면서 전원이 잘 들어오네요. 남편을 출장보낸 주부처럼 기뻐하며 행복한 세탁생활을 즐겼습니다. 다른 수리에 비해 수리비가 많이 들었지만 난이도는 최하였다는 점이 뿌듯합니다.

지금은 다시 귀차니즘과 히키코모리 생활로 인해 세탁기가 또 놀고 있습니다. 다음 세탁기는 저작권료로 떳떳하게 새 모델로 샀으면 좋겠네요. 곡은 썩어나는데...

별 내용은 없는 자가수리기였습니다. 자가수리를 좋아하시거나 구매할 돈도 없고 수리맡길 돈도 없는 가난한 자취생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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